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문단 편집) === [[카이사르의 내전|내전]] === 폼페이우스는 이미 60줄이었고, 그가 동방원정을 성공시킨 뒤 군사를 해산한 것을 보면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는 별로 욕심이 없었던 듯 하다. 이는 계속해서 야심을 드러내는 카이사르와 대조되는 모습이었고, 거기다 카이사르는 대표적인 민중파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원래 술라의 부하로 옵티마테스 출신이었다. 바로 이때문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붙어서 카이사르와 이간질했다. 더구나 원로원과 더욱 사이가 가까워진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의 핵심 멤버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이로 인해 카이사르와의 관계는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그 뒤 로마 군단에 식량보급이 지연되는 문제가 생겼다. 원로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단독으로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는[* 원래 집정관은 한 해에 두 명을 뽑아야 하므로 이는 사실 심각한 불법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독재관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필요할 때는 한 명이서 집정관에 맞먹는 권한을 휘두를 수 있었기 때문.] 식량보급 문제를 빌미로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법안을 상정한다. 당시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그가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부터 집정관 재선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공백이 있었다. 이 기간동안 카이사르는 형식상 군대 지휘권이 없는데, 평소 같으면 융통성을 발휘해서 묵인해줄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카이사르가 눈엣가시 같았던 원로원은 이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원로원과 손잡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집정관 재선에 출마할 때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실 술라,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같은 이들이 다 무시해서 그렇지, 원칙대로라면 로마 국내에(루비콘 강 이남) 총독이나 집정관이 무장 해제하지 않은 군대를 끌고 오는 건 명백한 불법이고 반역죄 급의 대죄다. 허용되는 경우는 개선식 뿐. 그나마도 개선식 전까지는 로마(시)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해야 한다는 법안을 상정한다. 비무장 상태로 로마에 입성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민간인 신분의 카이사르가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는 뻔했는데, [[그라쿠스 형제]]의 최후를 생각하면 딱 맞을 것이다. 따라서 바보가 아닌 카이사르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 휘하의 [[호민관]][[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을]] 등용시켜 지속적으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호민관은 집정관과 같이 합법적인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법안 상정에 대해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는 와중에, 카이사르는 한 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협상안을 제시한다.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는 대신 폼페이우스 역시 그가 거느리는 군대를 해산한다면, 법안에 대해 찬성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카이사르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온건한 제의였으나, 옵티마테스파의 집정관들이 펄펄 뛰면서 반대해 결국 무산된다.[*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졌으면 독재관 카이사르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며 원로원 주도의 로마는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특히 폼페이우스가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장인 스키피오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키라고 재촉하였다. 대화로 풀면 되지 내전까지 벌어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온건한 성향의 원로원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을 자신의 자택에 불러모아 훈계와 질책을 하며 결단을 촉구했을 정도. 이때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10개 군단병이 있음을 과시하고 자신의 장교단을 보여주면서 압력을 가하였다. 그런 폼페이우스의 재촉 끝에, 마침내 원로원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 권한인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한다. 이로써 호민관의 거부권과 신변 보호 권리는 무력화되었다. 다만 원로원도 카이사르에게 갈리아를 제패한 군단병이 휘하에 고스란히 있었으므로 그가 권고를 순순히 따를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골수 원로원파인 소 카토나 마르켈루스까지 내전까지 치르는 건 어이없다면서 반대하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일방적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적 업적이 카이사르에게 밀리자 아예 카이사르와 군사적 대결을 벌여 자신의 위업을 또다시 보여주려는 호승심을 품었던 듯하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 일파와의 협상이 결렬되고,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된 카이사르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루비콘 강을 건너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때 결단을 내리며 한 말이 당대에까지 [[명언]]으로써 회자되곤 한다.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쿠데타 소식을 접한 폼페이우스는 처음에 북상해서 카이사르와 이탈리아에서 싸우려고 했다. 폼페이우스 본인은 카푸아에 2개 군단을 배치시킨 후, 로마시 인근에서 징집을 시도하였다.[* 흔히 마리우스 이후 모병제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으나 공화정 시대에도 징병은 유지되었다. 단 마리우스 개혁 이전과 큰 차이가 있었는데 마리우스 개혁 이전엔 순수히 중산층인 병사들을 징병하였으나 개혁 이후엔 무산자 계급을 중심으로 징병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각각 대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 인근을 수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폼페이우스의 계획은 시행하자마자 난관에 부딪치는데, 이탈리아 주민들이 모두 카이사르군에 가담하길 원했던 것이다. 이는 불과 50년전에 벌어졌던 동맹시 전쟁의 영향이 컸다. 이탈리아 주민들은 고작 50년여 전까진 라틴 시민권자였다가 동맹시 전쟁에서 패하고 로마 시민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때 로마와 전쟁을 치렀으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이 전쟁의 결과 로마 시민권을 얻긴 했지만 로마 전체의 35개 선거구 중 겨우 4개만을 배정받았기에 원로원파를 향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런데 로마 시민권의 확대를 주장했던 민중파의 마지막 거두인 카이사르가 남하를 하니 계속 차별을 받았던 이탈리아 도시민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지지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원래 로마에 속해 있던 시민들조차 카이사르를 지지했는데,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완료하자마자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노골적인 적대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본토보다 더 큰 갈리아를 통째로 로마의 영역으로 만든 전쟁 영웅에 대한 터무니없는 대우는 로마 시민들을 적잖이 실망시켰고, 사람들이 원로원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기 충분했다.[* 뻔히 눈에 보이는 수작으로, 민중파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왔고 갈리아 정복이라는 큰 공을 세운 카이사르를 대상으로 협잡질을 했으니 화가 나지 않는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북쪽에 주둔한 폼페이우스 쪽의 군대는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점점 병력이 감소하는 기현상을 보인다. 병사들이 계속 탈영하거나 항복하면서 군단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민심이 극히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폼페이우스는 결국 브룬디시움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를 탈출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